스압) 알고 보니 아내가 폴리모프한 드래곤이었다면.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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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8 22.01.25 (화) 18:50





모험 도중 우연히 만난 그녀

마법도 잘 쓰고 똑똑하고 무엇보다 아름답다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소드마스터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머지 않아 결혼했고 완벽에 가까운 결혼 생활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사실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그것도 그녀의 입으로 직접.

 

"돌아갈 때가 되었어."

 

어쩐지 너무 늙지 않는다 했지.

나는 이제 늙어 이렇게 병상에 누워 있는데 아직도 기껏해야 중년 정도로만 보이는 게 이상하다 했지.

그냥 이상하게도 내 눈에 콩깍지가 참 오래 가는구나 싶었는데.

 

"미안해. 속일 생각은 없었어."

"날 사랑하긴 했어?"

"원래 드래곤은 다들 이래. 인간 세상에 나가 사람을 만나고 그때마다 새로운 자신을 연기하는 거야. 그래서 유희라고 하는 거야."

"날 사랑하긴 했어?"

"날 원망해도 좋아. 넌 그래도 돼."

"날 사랑하긴 했어?"

"이거 하나만 말해줄게."

 

그녀가 내 손을 붙잡았다.

 

"당신은 내 생애 가장 긴 유희였어."

 

그녀는 그렇게 나를 떠났다.

 

그녀가 떠난 집을 치우다 그녀의 방에서 몇 가지 책을 발견했다.

전부 인간의 수명에 관한 것이었다. 

유한한 인간의 수명을 늘리기 위한 허무맹랑한 연구들.

 

아마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멍청한 짓이었을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죽었다.

그녀가 떠나간 하늘을 바라보며.

 

 

  ***

 

 

제국력 577년.

내가 죽은 지 15년 뒤.

나는 어째서인지 15살 소년의 몸으로 전생해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드래곤은 유희가 끝나고 나면 자신의 둥지로 돌아가 긴 잠에 빠진다고.

다른 누군가 찾아오지 않는 한 깨지 않으며, 그동안 지난 유희를 되새기는 깊은 꿈을 꾼다고.

 

시골 농부의 아들이 된 나는 집을 나서 모험가 길드에 찾아갔다. 

농기구와 바꾼 낡은 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차고.

 

길드의 접수원이 물었다.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모험가가 되려는 이유는 뭔가요?"

 

오래전 꿈 같은 이야기다.

드래곤과 사랑을 했다니.

 

하지만 그렇기에.

오래전 꿈처럼 잊혀지기 전에, 그녀도 그것을 그저 꿈으로 묻어두기 전에.

 

나는 가야한다.

 

"드래곤의 둥지를 찾고 싶습니다.“

 

 

  ***

 

 

그녀의 둥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드래곤의 둥지가 어디에 있다는 얘기 같은 것은 전생에도 지금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허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모든 도서관을 뒤져보고, 드래곤이 나타났었다는 소문이 조금이라도 도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찾아갔다. 

 

그러던 중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마을사람들로부터 광인 취급을 받고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 채 몇 마디도 나누기 전에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녀 역시 폴리모프한 드래곤을 사랑했었다. 

 

비로소 서로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난 우리는 밤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론 공감하고, 때론 술잔을 엎을 만큼 몸을 흔들며 키득거렸다.

 

우린 한마음 한뜻으로 소리 높여 건배했다.

 

“그깟 드래곤이 뭐라고!”

 

하지만 그 뒤의 하지 않은 말이 무엇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 잘난 것은 드래곤이 아니다. 

그 사람이지.

 

깊은 밤, 끝내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녀를 위로할 수 없었다. 

같은 상처를 가졌으니 서로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란 사람들의 생각은 틀렸다. 

 

오히려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은 서로의 그 상처가 얼마나 아플지 알기에 감히 어떤 위로도 하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기댈 수 있게.

그녀가 바닥까지 쓰러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도록.

 

다음날 아침, 그녀는 내게 반지 하나를 건넸다. 

 

“그가 준 반지에요.”

“이걸 왜 내게….”

“그에게 전해주세요. 나라는 사람과 만났다는 걸 잊지만 말아달라고. 그것마저 안 된다면 그냥 그의 둥지 한구석에 몰래 버려주세요. 드래곤의 둥지에는 보물들이 많대요. 그 보물들 사이에 버려주세요. 이 작은 반지도 몰래 보물 취급을 받을 수 있게요….”

 

그녀의 반지를 소중히 받아들었다.

 

“…나 더 이상은 그 반지를 갖고 있을 자신이 없어요.”

 

그녀는 내게 웃어보였다.

 

나는 바쁜 발걸음으로 마을을 떠났다.

애써 웃어보인 그녀의 미소가 또 허물어지기 전에.

 

 

  ***

 

 

그녀는 말했다.

 

 - 그 사람은 늘 자신의 고향이 대륙 서쪽 킬바인 산맥이라고 했어요. 그땐 그냥 허풍인 줄만 알았는데….

 

킬바인 산맥.

온통 바위뿐인 험하디 험한 산맥.

게다가 가는 길에는 온갖 마물이 득실거리는 오지 중의 오지.

사실상 제국의 영토도 아니기에 제대로 된 지도조차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가야했다. 

어쩌면, 같은 드래곤이라면 다른 드래곤의 둥지를 알지 않을까.

 

헤메고 더듬거리고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나는 끝내 드래곤의 둥지를 찾아냈다.

그녀가 사랑했던 드래곤의 둥지는 깊은 동굴 속에 있었다. 

 

마침 드래곤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당당히 그 앞에서 다가갔고, 황금색 찬란한 비늘을 자랑하는 그 드래곤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아, 인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필멸의 존재가 당도했구나. 이곳까지 온 것을 보니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져왔겠지?”

 

나는 그녀의 반지를 보여주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여인의 반지입니다. 이만하면 흥미롭겠습니까?”

 

그가 흥미를 보였다. 

그가 역시 황금색으로 빛나는 동공을 가늘게 뜨고 내가 내민 반지를 유심히 쳐다봤다. 

 

“흥미롭군. 내가 준 것이 맞아. 이름도 기억나는군. 셀레느. 그녀가 아직도 날 사랑하던가?”

“이제까지는 그랬습니다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잊지는 못 할 것입니다.”

“가엾어라. 이럴 때면 드래곤이란 종족으로 태어난 것이 비참하게 느껴진다네.”

“어째서입니까.”

“금방 그녀를 잊고 말거든. 본의 아니게도.”

 

짧은 수명이 필멸자의 족쇄라면 기나긴 삶은 우리 드래곤의 고질병과도 같다며 그가 한탄했다. 

 

“권태, 우리 드래곤의 영원한 동반자여.”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그가 반지를 가져가더니 물었다. 

 

“소원 하나 들어주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져온 필멸자에게 그 정도도 못해줘서야 될까.”

 

나는 답했다. 

 

“드래곤의 둥지를 찾고 있습니다.”

 

그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내를 찾고 있다는 내 이야기를.

그는 반지를 보았을 때보다 몇 배나 더 흥미로워하며 내 이야기를 캐물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고양이가 가르릉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좋아, 도와주지. 흥미로워. 아주 흥미로워.”

 

그 드래곤의 본명이 뭔지, 어디 사는지도 모르기에 단번에 찾아갈 수는 없겠지만 유희가 끝난 시기를 바탕으로 수소문해보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그는 단언했다. 

 

더불어 선심쓴다는 듯이 덧붙였다. 

 

“이건 소원으로 안 치겠네. 무척 흥미로웠거든.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니 소원으로 치면 안 되지. 안 그런가?”

 

 

  ***

 

 

그는 드래곤 중에서도 제법 강하고 영향력이 있는 축에 속하는 듯했다. 

막무가내로 다른 드래곤들을 찾아가 정보를 알아냈고, 가끔은 자고 있는 드래곤의 귓가에 브레스를 불어넣으며 깨우기도 했다. 

 

허나 워낙 가진 정보가 없다시피 했기에 진척이 쉽진 않았다. 

 

결국 인간의 형태로 변해 인간 세상에서 또다시 정보를 수소문하기도 해야 했다. 

 

“왜 이렇게 열심히 도와주시는 겁니까?”

 

내가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흥미롭지 않나.”

 

그는 그 흥미라는 것에 무척이나 집착하고 있었다. 

 

“흥미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기나긴 삶을 산다는 것은 제법 힘든 일이네. 무슨 짓을 해도 언젠가는 결국 잊어버리고 말지.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아무리 많은 일을 겪어도 시간이라는 풍화작용 앞에 남아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아.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내 나이쯤 되면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한다네.”

 

드래곤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는 걸까.

나 역시 그의 말에 흥미가 동했다.

어쩌면 그와 함께 다니던 나날 동안 그를 닮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두려운 것입니까?”

“오, 그야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지.”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것.”

 

그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겠지. 어찌 잊겠나.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황금색 비늘을. 하지만 ‘나’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야. 내 개인적인 견해지만 ‘나’를 유지하는 것은 이 몸뚱아리가 아니라 수백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쌓아온 기억이라는 것이 내 생각일세. 그런데 그런 기억들이 점차 사라져간다? 세월을 못 이긴 왕궁 옛터의 모래와 돌맹이처럼 부스러져버린다? 그것만큼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나.”

“그래서 그렇게 흥미로운 것을 찾아다니시는 겁니까?”

“그렇지. 내게 이런 일들은 그저 흥미거리가 아니야. 말하자면, 하나의 표식과도 같은 것이지.”